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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국립묘지에서 처음 만난 외할아버지



1. 외할아버지는 빨치산에 의해 돌아가셨다. 당시 어머니 6세.
2. 현재는 할아버지 유골을 찾을 수 없다.
3. 올 8월 국립묘지에 부부위패로 봉안 되었다.




 








내 어머니의 아버지 염 윤 용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어머니께서 꼬마 때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친할아버지도 뵌 적이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 정
그리웠나보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 할아버지에 대해 자주 묻곤
했지만 당연히 어머니께서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서 내게 그분에 대한 말씀을 많이 못 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머니께 자꾸만 떼쓰듯
묻곤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나랑 함께 공유하자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동작동 국립묘지내



나의 외할아버지 염윤용께서는 1951년 2월 19일 돌아가셨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그때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봉화역에서
지서장[요즘에 파출소장]으로 근무 하는 경찰 이셨다.
목격자 말에 의하면 빨치산 토벌대를 지원 나간 동료, 부하들
대신 홀로 지서를 지키시다가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 몰래 던진
수류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나이 겨우 27세 이었다.
20대 중반 아름다운 아내와 여섯 살 꼬마였던 우리 어머니를
남겨두고 그렇게 경북 봉화에 묻히셨다.


10년 뒤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고, 나의 어머니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어머니는 어렵게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시고
원호처[지금 보훈처]에서 근무 하시다가 아버지와 결혼 해 자녀
넷을 낳아 기르셨다.






동작동 국립묘지내



결혼해서 자식들 낳아 키우시느라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를 찾을
생각도 못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산소라도 보고 싶다는 나의 끊임없는 설득과 잔소리에
몇 년 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북 봉화로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가게 되었다.


봉화 경찰서와 봉화역 파출소를 다니며 산소 위치를 수소문 한 결과,
십여 년 전 그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국가에서 유골을 처리했다고
한다.





국립묘지내 부부위패




그렇게 또 외할아버지를 기억해 주는 사람 없이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다가, 최근에 같이 살게
되었다. 같이 살면서 부터 나는 다시 어머니께 외할아버지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국립묘지로 모시는 방법이 있을 것 같으니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보훈처와 경찰청에 문의 한 결과 유골이 없을 경우 위패봉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10년 6월 11일 위패봉안신청서를 제출하고 약 두 달 만인 2010년
8월 3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할머니 이름과 함께 부부 위패봉안
되었다.



부부 위패봉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지난주에 어머니와 단 둘이 위패가 모셔진
국립묘지에 다녀왔다.
난생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가 본 것이고 할아버지께 처음 인사
드리는 것이다. 

그동안 하늘에서 쓸쓸히 계셨을 할아버지 넋을 앞으로는 국립묘지
찾아가서 위로 해 드릴 수 있어서 가을 하늘 만큼이나  마음이
맑아졌다.